글: 김종철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가 없었다면 이소룡에 대한 열기가 지금처럼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소룡에 대한 추억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를 하지만, 최근처럼 그 열기가 뜨거워졌던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권상우가 쌍절곤을 휘두르며 학교 옥상에서 쌓였던 분노를 폭발시킬 때 관객은 짜릿함과 함께, 추억 저 편에 자리 잡고 있던 이소룡을 꺼내어 다시금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간을 보냈다. 노란색 츄리닝, 특유의 괴조음, 조각 같은 몸매는 이소룡하면 연상이 되는 것들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슷한 경우는 또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활극 [킬 빌]의 등장이다.
묘하게도 [킬 빌]은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타란티노가 어떤 영화들에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자신의 영화 속에 어떤 식으로 녹여내고 있는지, 그에 대한 언급이 더 많았고 또 화제였다.
[킬 빌]은 단순히 아주 잘 만든 오락성이 강한 B급 영화일 뿐이지만, 그것을 더욱 고급스럽게 포장을 한 것은 평론가와 관객들의 도움이 컸다. 비록 영화는 국내에서 흥행이 신통치 않았지만, 팬들은 [킬 빌]을 통해 오랜만에 느껴보는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타란티노의 [킬 빌]은 이소룡 세대를 넘어서는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쇼브라더스 영화들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지금 한국의 대다수 영화 관객들은 사실상 쇼브라더스 영화들과는 인연이 없다.
적어도 이 제작사의 영화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여지려면 지금 40대의 연령층이나 해당이 된다. 물론 극소수의 영화광은 어떤 식으로든 쇼브라더스의 영화들을 구해서 보고 나름의 추억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부천영화제에서는 이들 쇼브라더스 영화들에 대한 특별 회고전을 마련해 일반 관객들도 조금은 익숙해진 이름이다.
청춘의 시간을 어떤 시대에서 보냈는지에 따라서 공유하는 추억은 분명 다르다. 어떤 이는 쇼브라더스에 대한 추억을 소중히 여길 것이며, 또 어떤 이는 골든하베스트에 대한 추억이 더 소중할 수도 있다.
배우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연령층이 높은 이들에게는 왕우, 강대위, 유가량, 정패패와 같은 배우들을 최고로 칠 것이며, 그 뒤를 있는 세대들은 이소룡을 최고로 친다. 그리고 이제 20대 후반과 30대에 살고 있는 들어선 사람들은 성룡과 그의 영화들이 최고가 된다.
이 글은 쇼브라더스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쇼브라더스란 어떤 제작사였으며, 그들의 전성기와 함께,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또 대표적인 배우들과 작품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일종의 가이드 역할의 성격이다.
몇 년 빨리 태어나 쇼브라더스의 영화들을 많이 접했더라면 좀 더 충실한 내용으로 꾸밀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다. 앞으로 많은 영화들이 국내 DVD로 발매가 될 예정이니, 그들 영화와 배우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 쇼브라더스의 아버지 런런 쇼
쇼브라더스의 탄생은 관객의 기호와 맞아 떨어진다. 60년대 후반 홍콩 영화계는 북경어 중심의 황매조 영화와 문예 영화가 대표적이었다.
홍콩 영화하면 떠오르게 되는 검술 영화나, 쿵푸 영화들은 당시 북경어로는 제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고집은 극장을 찾는 관객의 입맛에 따라 자연히 변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성이 떨어지는 영화들을 만드는 것은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는 것이기 때문에 북경어 영화들은 관객의 기호에 따라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당시 홍콩의 젊은 관객들은 경극 형태의 황매조 영화나 문예 영화를 보기 보다는 광동어로 이루어진 검술영화와 쿵푸 영화를 더 선호를 했다. 황매조는 중국 호북성 황매현의 채다조(採茶調)라고 불리는 곡조를 주로 하는 경극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광동 오페라 작품 전체를 ‘황매조’라 부르게 되었다. 이들 영화는 자연스레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60년 말 홍콩의 어지러운 사회적 정서와도 무관하지 않다. 극장가를 잠식하는 젊은 관객은 점점 더 액션 영화들을 원했다.
북경어 영화들은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재빨리 편승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궁지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전체적인 북경어 영화들의 위기를 구해낸 것이 바로 런런 쇼에 의해 설립된 쇼브라더스(邵氏兄弟香港公司)였다.
런런 쇼는 1907년 소씨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고, 젊은 시절부터 영화계에 몸을 담아 많은 경력을 쌓았다. 그는 쇼브라더스를 만들기 이전에도 말레이 반도에서 영화배급망을 구축하고 ‘소씨형제(邵氏兄弟)’를 설립해 현지에서 영화 제작까지 겸한다. 그 후 1959년 쇼브라더스가 정식으로 설립이 된다.
런런 쇼는 비단 쇼브라더스의 발전뿐만 아니라 홍콩 영화계의 전반적인 발전을 함께 가져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장본인이다. 비록 회사에서 절대적인 권력자로 군림을 하며 훗날 쇼브라더스의 몰락을 가져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영화사와 홍콩 영화 발전을 동시에 꾀하며 많은 시간과 노력, 돈을 투자했다. 1965년 청수만에 ‘소씨영성(邵氏影城)’이란 거대한 스튜디오를 건설했고, 재능 있는 감독들이 숱하게 배출이 되었던 일본의 닛카츠와 토호의 인재들을 초청해서 쇼브라더스 인력들에게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전수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한 쇼스코프라 불리는 독자적인 시네마스코프를 개발했고, 북경어와 영어를 동시에 자막으로 사용하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북경어와 영어를 동시에 자막으로 사용했던 것은 홍콩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혹자는 화면을 많이 가린다고 불평을 하지만, 최대한의 상업적인 결과를 거두어야 하는 제작사로서 매우 참신한 기획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추진력과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런런 쇼는 배우 양성을 목적으로 한 ‘남국실험극단(南國實驗劇團)’을 설립해 재능 있는 배우들을 발굴함과 동시에 그들을 장악해 나간다.
런런 쇼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실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감독과 스타 배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는 운이 따랐다. 젊은 관객들이 검술 영화와 쿵푸 영화를 선호함에 따라 쇼브라더스는 1966년에 황매조 영화의 제작을 중단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관객이 선호하는 영화들을 제작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와호장룡]에서 푸른 여우로 젊은 관객들과 만났던 정패패가 주연을 한 [대취협(大醉俠)]이다. 호금전이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감독 특유의 섬세한 묘사와 우아한 동작의 결투로 무협 영화의 판도를 바꿔 놓는다.
- 무협의 신과 여신, 호금전과 정패패
정패패(鄭佩佩)는 [대취협]에서 금연자로 분해 자신의 장기였던 발레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 매혹적인 캐릭터를 구축했다.
그녀는 1946년 상하이에서 출생을 했고 60년에 홍콩으로 건너가 쇼브라더스와의 인연을 맺는다. 정패패는 런런 쇼가 설립한 남국실험극단의 2기생으로 입단을 했고, 졸업 후 쇼브라더스와 계약을 하고 [보련등(寶蓮燈)]으로 데뷔를 한다. 또한 당시 유행이던 문예영화 [정인석(情人石)]에 출연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가치는 무협 영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녀의 재능은 호금전 감독과의 만남으로 만개한다. [대취협]은 호금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정패패 자신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그녀는 ‘무협의 여왕’으로 불리며 수많은 무협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녀는 이후에도 쇼브라더스에서 제작한 [향강화월야(香江花月夜)], [금연자(金燕子)]를 통해 확실한 이미지 구축에 성공을 거두면서 아시아 스타로서 떠오른다.
정패패는 [영자신편(影子神鞭)]을 끝으로 쇼브라더스를 떠났지만, 이후 [칠소복]과 [와호장룡]을 통해 다시금 팬들과 재회의 시간을 가졌다.
정패패를 스타로 만든 호금전은 무협 팬들에게 매우 친숙한 감독이다.
1932년 4월 29일 북경에서 출생한 그는 일찍이 경극에 심취를 했고, 1949년에 홍콩으로 이주를 한다. 이듬해 호금전은 미술 스태프로 홍콩 영화계에 입문을 하게 되는데, 그는 운이 좋게도 당대의 대스타인 엄준(嚴俊)에 의해 발탁되어 1954년 [흘견광적인(吃見光的人)]에 출연하는 행운을 거머쥔다.
쇼브라더스와의 인연은 1959년부터이며, 이한상 감독의 [강산미인(江山美人)] [무측천(武則天)]과 같은 작품에서 배우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이한상 감독 밑에서 경력을 쌓아 나갔고, [대지아녀(大地兒女)]로 데뷔를 한다. 사실상 그의 명성은 정패패와 함께 한 [대취협(大醉俠)]의 큰 성공으로 시작이 되지만, 쇼브라더스와의 인연은 이 작품으로 끝이 난다. 런런 쇼와의 충돌로 인해 그는 [대취협]을 끝으로 쇼브라더스를 떠나 대만으로 건너간다.
호금전은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감독이었지만 훗날을 생각하면 쇼브라더스로서는 크나 큰 인력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후 그는 대만에서 작업을 하며 1967년 [용문객잔(龍門客棧)]을, 1971년에는 자신의 재능을 집대성한 무협의 걸작 [협녀(俠女)]를 발표한다. [협녀]는 1975년 칸 영화제에서 기술상을 수상하며 아시아 전역으로 호금전의 이름을 널리 떨치게 한다. 호금전은 자신의 뒤를 이어 쇼브라더스의 간판스타로 떠오르는 장철(張徹)의 영화와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는 무엇보다 이전과는 다른 정통 중국 무협 영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호금전은 자신이 소년 시절 그렇게 좋아했던 경극을 근본으로, 무협의 동작을 만들어 나갔고 신체의 부드러움을 강조해 마치 춤을 추는 듯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전설적인 명장면으로 일컬어지는 [협녀]의 대나무 숲에서의 대결을 보면 호금전의 스타일이 집약이 되어 있다. 초상비(草上飛), 답설무흔(踏雪無痕) 등으로 불리는 중력을 무시한 강호인들이 벌이는 우아한 동작, 그것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 장철(張徹)과 왕우(王羽)의 시대
호금전은 떠났지만 그렇다고 쇼브라더스에 치명타가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 남자에게 큰 기회를 가져다주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무협 영화의 팬은 전혀 다른 스타일을 지닌 두 명의 걸출한 감독의 영화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호금전의 부재로 쇼브라더스는 하루 빨리 그에 버금가는 재능을 지닌 인물이 필요했고,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인물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1962년 쇼브라더스에 입사를 해 각본을 담당하면서 경력을 쌓고 있었던 장철이 그 주인공이다.
장철은 62년에서 67년 사이에 20편 이상의 각본을 썼고, 그 기간 동안 자신이 직접 메가폰을 잡아 작품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은 평가가 좋았으며, 결국 장철은 호금전의 뒤를 이어 쇼브라더스의 간판으로 떠오르게 된다. 호금전은 정패패를 내세워 걸출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듯이 무협 영화는 감독의 능력과 함께 배우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점에서 장철은 매우 운이 좋았다.
1964년 장철이 감독한 [호협섬구(虎俠殲仇)]에서 그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쇼브라더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게 되는 걸출한 스타와 만나게 된다. 바로 왕우(王羽)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장철은 왕우를 만남으로서 그 자신이 오래전부터 꿈꾸던 이상적인 무협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을 한다. 그렇게 탄생한 [독비도(獨臂刀)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호금전의 [대취협]으로 대표되는 구파에서 신파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왕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외팔이다. [독비도]에서 왕우는 외팔이 역을 맡았고, 두 사람의 합작은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준다. 호금전의 영화와 달리 유혈낭자한 폭력과 비장미가 넘치는(이런 성격은 [자토이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장철의 영화는 무술 감독을 맡은 유가량의 도움으로 더욱 빛이 났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는 우스개 소리가 왕우에게는 현실이 되었다.
[독비도]를 시작으로 홍콩 무협 영화는 왕우의 천하가 된다. 그로 인해 장철의 재능은 꽃을 피웠고, 두 사람은 이후로도 [대자객(大刺客)] [금연자(金燕子)] [독비도왕(獨臂刀王)]과 같은 작품들을 연이어서 발표하며 쇼브라더스의 황금기를 이끄는 쌍두마차가 된다. 이 작품들을 통해 쇼브라더스는 아시아 지역 최고의 영화사로 발전을 했고, 신화의 주인공인 왕우는 스타가 아닌 신적인 존재로까지 대접을 받는다.
홍콩 사람들은 왕우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를 ‘천황거성(天皇巨星)’으로 칭한다.
이처럼 왕우는 전례가 없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그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 천황거성(天皇巨星)으로 불린 슈퍼스타 '왕우'
왕우는 1943년 3월 18일 중국 강소성 출생으로 본 명은 왕정권(王正權)이다.
그는 17살 때 홍콩으로 이주했으며 1964년에 쇼브라더스에 들어간다. 학창 시절에는 물에서 하는 수상 경기의 일종인 수구로 이름을 날렸지만, 집단 난투극을 계기로 운동선수로서의 막을 내린다. 이후 [독비도]의 성공으로 스타가 되고, 1969년에는 자신이 직접 감독을 맡은 [용호투(龍虎鬪)]으로도 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를 달린다. 당시 왕우의 입지는 그 자신이 직접 감독을 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당시 일개 배우가 감독을 하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쇼브라더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립자인 런런 쇼의 절대적인 권력 체계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배우가 감독을 하겠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더욱이 런런 쇼는 자신이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었고, 배우란 존재에 대해서 하찮게 생각을 했기에 [용호문]은 왕우의 존재가 당시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신화와 같은 왕우의 성공은 영화 속의 모습과 달리 현실에서 스스로의 관리를 하지 못해 몰락을 자초하게 된다.
범죄조직 흑사회와의 유착 관계, 임청하와의 스캔들, 그리고 상해사건, 뺑소니 등의 좋지 않는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에 팬들은 왕우에게 실망감을 느꼈고, 그는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결정적으로 왕우가 홍콩을 떠나게 된 것은 런런 쇼에게 맞선 일 때문이다.
런런 쇼가 이끄는 당시 쇼브라더스는 배우들에게 불리한 조건의 개런티를 월급으로 지급을 하고 있었고, 이에 불만을 제기한 왕우는 법정싸움에서 패하면서 홍콩 영화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대만으로 떠난다. 천황거성으로까지 불리던 왕우의 너무나 초라한 은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는 대만에서 계속 영화 활동을 한다.
비록 왕우가 그 자신의 관리 실책으로 인기를 잃었지만, 런런 쇼의 독재적인 체계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호금전과의 관계도 있었고 왕우와의 법정 시비는 앞으로의 쇼브라더스의 미래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와도 같다.
그것은 설립자인 런런 쇼의 문제이다. 그가 배우들을 잘 관리를 하고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더라면, 불세출의 스타 왕우의 몰락이 그렇게까지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타를 몰라보는, 스타를 대접할 줄 모르는 런런 쇼의 독단은 서서히 쇼브라더스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또한 왕우의 쓸쓸한 은퇴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예고한다.
한 편 북경어로 영화를 제작하면서 승승장구를 하고 있던 쇼브라더스와 달리 광동어 영화들은 그야말로 재난을 맞이한다. 젊은 관객들의 인기를 모았던 광동어 영화들은 쇼브라더스의 재빠른 변화로 역전이 되었고, 그 결과 광동어 영화는 간신히 그 맥을 유지하는 식이 된다.
홍콩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소재라고 하는 [황비홍]시리즈가 꾸준히 만들어졌지만, 관객들에게 점점 외면을 받아간다. 그 밖에 소방방과 진보주와 같은 배우들의 영화가 나름대로 관객을 모았지만, 쇼브라더스의 독주를 제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70년대 들어서 광동어 영화는 초토화가 된다. 70년에 단 1편, 72년에는 한 편도 제작이 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던 것이다.
- 왕우의 뒤를 이은 적룡과 강대위
왕우를 잃고 가장 안타까워한 인물은 장철이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빛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왕우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한 명의 걸출한 스타는 떠났지만 쇼브라더스는 호금전과 마찬가지로 큰 데미지는 받지 않았다. 적룡과 강대위 두 명의 배우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 두 사람과의 작업은 69년에 이루어진다.
장철은 [사각(死角)]을 통해서 두 사람의 재능을 끌어내었고, 70년 두 사람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복수(報仇)]를 통해서 왕우의 뒤를 잇는 슈퍼스타로 만들어 놓는다.
두 사람은 [복수]에서 형제로 연기를 했고, 장철은 그 자신의 장기인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장대한 복수극의 형태로서 영화를 만들어 나갔다.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두 명의 배우와 장철 모두에게 중요한 작품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복수]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바로 시대의 변화이다.
늘 고전극에 매달려있던 무협 액션 영화들은 [복수]를 기점으로 해서 현대적인 액션 영화 스타일로 전환이 되어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왕우에 이어 강대위, 적룡 덕분에 쇼브라더스는 여전히 명성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강대위와 적룡 두 사람은 오늘날의 영화 팬들에게도 익숙한 배우들이다. 강대위는 양친이 모두 유명한 배우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아역 배우로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66년에 무술지도로 쇼브라더스에 입사를 했고, [사각]과 [복수]를 통해서 아시아의 스타로 떠올랐다. 나 홀로 스타인 왕우와 달리 강대위는 적룡과 그 인기를 양분했고, 두 사람 모두 쇼브라더스의 간판스타로 큰 인기를 누린다. 적룡은 드라마틱한 배우의 길을 걷는데, 훗날 거듭된 실패로 고만고만한 배우로 전락을 했지만, 오우삼의 [영웅본색]을 통해 화려한 재기를 한다. 강대위 역시 나이가 들어서도 활동은 지속적으로 했다. [맹룡과강(猛龍過江)]에서 이소룡과 싸움을 했던 황인성과의 대결이 볼만했던 [홍금보의 대나팔]에서 그는 짧게 자른 머리로 코믹한 형사 귀신 역을 맡았다.
또한 텔레비전 무협 시리즈물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구음진경]에서는 중년의 황약사 역을 맡아 아내를 잃고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사는 캐릭터를 소화해 갈채를 받았다. 그는 후배 배우들과의 공연을 활발하게 했다. 주윤발과 호흡을 맞춘 [대호출격], 이연걸과는 [황비홍 2], 성룡의 [쌍룡회]와 같은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며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 쇼브라더스의 실책, 그리고 거듭되는 성공
쇼브라더스는 아시아 최고의 영화사가 되었지만 런런 쇼의 판단 미스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 발목을 잡은 것은 레이몬드 초(추문회)였다. 그는 쇼브라더스에서 제작본부장 일을 맡았지만, 런런 쇼의 애인인 방일화와 충돌을 거듭하면서 결국 70년에 허관창과 라유 부부와 함께 쇼브라더스를 떠나 골든하베스트(嘉禾影片公司)를 설립했다.
초기의 골든하베스트는 매우 영세한 곳이지만, 런런 쇼가 그를 찾아왔던 인재를 몰라보는 통에 그 복은 모두 골든하베스트로 들어가게 된다. 이는 천운과도 같은 것이었다.
런런 쇼의 실책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최고의 영화사로 군림하던 쇼브라더스에게 치명타를 안겨주는 것들이었고, 70년 4월에 그를 찾아와 계약을 하려던 한 청년을 문전박대를 한 것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소룡이다. 이 자신감에 넘치는 젊은이는 쇼브라더스에게 거절을 당하지만, 골든하베스트의 류량화에 의해서 전격 발탁이 된다. 바로 전설이 시작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산대형(唐山大兄)]의 대히트로 런런 쇼는 자신의 실책을 자책하며 이소룡을 찾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운은 골든하베스트에게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쇼브라더스는 이소룡을 잃었지만 여전히 거대한 영화사였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동남아 지역 외에 해외 시장을 두드렸고, 그 첫 번째가 바로 그 유명한 [천하제일권(天下第一拳) -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다.
이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꼽는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한 편으로 선정이 되었던 작품으로, 한국인 정창화가 감독을 한 작품이었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미국에 개봉이 되어 그 해 전미흥행수익 10위권 내에 들어가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고, 쇼브라더스는 미국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한국에선 [철인]이란 제목으로 개봉이 되었고, 해외에서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새로운 스타를 발굴하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런런 쇼는 토호와 닛카츠 영화사에서 재능 있는 배우들을 주목하곤 했는데, 그 가운데 쿠라타 야스아키라는 일본 배우가 런런 쇼에 눈에 들어 쇼브라더스로 오게 된다.
이 젊은이는 훗날 아시아의 흑표범으로 불리게 되는 배우였고, 장철의 [권격(拳擊)]의 속편에 해당하는 [악객(惡客)]이란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홍콩 영화계에 신고식을 치른다. 이 영화에서 쿠라타는 강대위와 적룡을 상대로 뛰어난 솜씨를 자랑했다. 홍콩 관객 역시 신선한 뉴페이스의 등장에 갈채를 보냈다.
그리고 초기 쇼브라더스의 간판 감독이었던 이한상이 복귀를 했다. 그는 장철 감독과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던 인물이지만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했다. 63년에 쇼브라더스를 떠났지만, 런런 쇼는 여전히 그를 신뢰하고 있었고 결국 [대군벌(大軍閥)]을 통해 화려하게 복귀 식을 치르게 된다. 이 영화는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넘어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주인공을 맡은 허관문이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런런 쇼의 실책으로 이소룡을 놓쳤지만 정창화, 이한상, 그리고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벌인 장철, 초원과 같은 감독들로 인해 쇼브라더스는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초원 감독의 [칠십이가방객(七十二家方客)]은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 영화는 북경어가 아닌 광동어로 제작이 된 작품이었고, 사멸해가던 광동어 영화들이 부활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이 영화의 흥행 수익은 이소룡의 [맹룡과강]은 물론이거니와 [용쟁호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밝은 미래만 있을 것 같은 쇼브라더스의 성공은 오래지 않아 또 다시 런런 쇼의 실책으로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차게 된다. 그리고 그 복덩어리는 이소룡의 죽음으로 고전에 처한 골든하베스트에게로 옮겨간다. [대군벌]로 스타가 된 허관문이 그 주인공이다.
허관문은 대스타였다. 그러나 런런 쇼는 그를 몰라봤다. [대군벌]의 히트 후 허관문은 독립프로덕션인 허씨형제공사(許氏兄弟公司)를 설립했고, [귀마쌍성(鬼馬雙星)]을 공동 제작할 것을 의뢰하지만, 런런 쇼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다. 이에 크게 화가 난 허관문은 이소룡의 죽음으로 스타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골든하베스트를 찾아갔고, 레이몬드 초는 그의 상품가치를 단번에 알아보고 [귀마쌍성 - 미스터 부의 첫 번째 작품]에 공동으로 투자를 한다.
허관문의 데뷔작 [귀마쌍성]은 홍콩 박스오피스를 새롭게 쓰는 대히트를 기록하고, 런런 쇼는 이소룡의 경우처럼 뒤늦게 허관문을 찾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장철 영화의 1등 공신 유가량
장철의 성공은 얼핏 그 자신의 능력과 좋은 배우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듯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빛이 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에게 힘을 실어주던 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유삼 형제의 맏형인 유가량이었다. 그는 실제 뛰어난 무술가였고, 그러한 재능은 장철의 영화들에서 고스란히 녹아져 있었다. 장철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 [금연자] [권격] [악객] [마영정]과 같은 작품들이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무술 감독을 맡았던 유가량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가량과 장철과의 인연은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결국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된다. 장철은 무술 영화로 명성을 떨쳤지만, 그 속내를 보면 무술 감독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유가량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고, 그와 함께 장철 영화를 빛나게 했던 또 다른 무술 감독 당가는 장철과 크게 싸운 후 결별을 했다.
홍콩에서 활동을 하던 유가량이 장철이 있는 대만으로 건너간 것은 그의 달콤한 제의 덕분이다. [소림오조]가 끝나면 감독으로 데뷔를 시켜주겠다는 제의는 유가량으로선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고, 결과적으로 유가량은 감독을 맡지 못하고 계속 장철의 영화에서 무술 감독만을 맡는다.
이쯤에서 유가량과 왕우가 만나게 된다. 홍콩 영화계에서 퇴출을 당했던 왕우는 대만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와의 만남은 장철과의 결별이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장철은 속이 좁은 사람이었다.
왕우가 유가량에게 [독비권왕대파혈적자(獨臂拳王大破血滴子) - 외팔이 권왕](이 영화에서 혈적자를 사용할 때 나오는 음악은 [킬 빌]에서 타란티노가 인용을 하고 있다. 고고 유바리가 철구를 사용할 때 흘러나온다)의 무술 감독을 부탁하면서 거액을 제시했고, 그 돈은 장철을 격분케 했다.
자신과 별 차이 없는 돈을 받는 것을 장철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유가량은 장철과 결별을 하고 왕우의 작품을 끝으로 홍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렇게 소원해 마지않던 감독직을 맡게 된다. 그 작품은 [신타(神打)]로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된다.
- 쇼브라더스의 몰락
하지만 전반적으로 쇼브라더스는 쇠퇴기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이미 홍콩의 영화 관객들은 쿵푸 영화에 식상해있었고, 여기에 쇼브라더스 내부의 문제가 겹쳐지면서 재능 있는 감독과 배우들이 하나 둘씩 떠나갔다.
이유는 런런 쇼에 있었다. 그는 모든 걸 자신이 장악하기를 원했고, 그러한 독재를 반길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허관문과 같은 대스타가 골든하베스트로 옮겨간 것은 큰 손해였고, 여기에 오우삼 같은 80년대 홍콩 영화의 새바람을 몰고 온 주인공들이 모두 경쟁 제작사로 옮겨갔다. 이후로 홍콩 영화 박스오피스를 점령하는 것은 쇼브라더스가 아닌 골든하베스트의 차지였다. 물론 쇼브라더스도 나름의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정패패와 같은 여걸의 수준은 아니지만 그녀가 결혼 후 은퇴를 했을 때 그 빈 공간을 채운 시사와 이려려는 눈에 띄는 존재였다. 시사는 [종규낭자]에서 책찍의 달인으로 연기를 하며 시선을 끌었고, [태극권]과 같은 영화에서 자신을 재능을 발휘했다.
이려려 역시 강대위와 영화를 하면서 여검객으로서의 매력을 뽐냈지만, 런런 쇼는 운이 없었다. 그 이유는 두 번째 부인과도 같은 방일화의 횡포로 쇼브라더스의 여배우들이 견뎌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철 감독은 정패패를 스타로 만든 호금전과 달리 여배우를 주역으로 내세운 예가 없어 동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었다.
그리고 유가량, 유가영, 유가휘 유삼 형제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유삼형제가 감독, 주연을 맡은 작품은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유가휘를 주연으로 내세운 [소림 36방(少林寺三六房)]과 같은 영화는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했지만,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는 쇼브라더스의 영광을 재현하기란 힘이 들었다.
또한 유가량은 80년에 [장배(長輩)]의 주역으로 혜영홍을 캐스팅하면서 그녀의 재능을 꽃피우게 했다. [장배]에서 젊고 씩씩한 숙모 역으로 열연한 혜영홍은 제1회 홍콩 금상장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획득해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쇼브라더스는 나름대로 성공작들을 꾸준히 내고 있었지만, 운은 골든하베스트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
제 아무리 간판스타들이 든든히 받치고 있고, 유삼 형제의 활약이 두드러져도 80년대 들어 엄청난 스타의 존재로, 쇼브라더스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의 존재는 선배 스타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무명 생활을 했지만 그는 성실한 자세로 영화에 임했고, 그의 이름은 흥행의 보증수표와도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스타가 된 성룡. 그는 쇼브라더스의 스타 배우들을 모두 합친 것 보다 더 한 위력을 지닌 배우였다.
쇼브라더스의 쇠퇴기는 런런 쇼와 방일화가 가져왔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런런 쇼는 설립자이면서 쇼브라더스를 아시아 최고의 영화사로 만든 수완 좋은 인물이었지만, 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이고, 나누기 보다는 독점을 하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두려던 성격은 결국 자신이 만든 영화사를 궁지로 몰아간 이유가 된다. 경쟁자였던 레이몬드 초는 런런 쇼와는 정 반대로 감독과 배우들을 대접했고,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이익 분배에 있어서도 공정하게 함으로서 큰 신뢰를 쌓아 나갔다. 여기서 런런 쇼, 그리고 쇼브라더스의 승패는 정해진 것이었다.
한 때 무협 영화로 아시아 최고의 영화사가 되었던 쇼브라더스. 이들은 제 발로 찾아온 복덩어리 이소룡을 거부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가라앉기 시작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0년대 홍콩 영화계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스타가 된 허관문. 그리고 80년대 우뚝 솟은 큰 별, 성룡의 눈부신 성공은 그 누구도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결과적으로 그 시대를 이끌어갔던 대표적인 배우들을 거두어들이지 못한 런런 쇼의 실책은 후대의 귀감이 남는다.
그럼에도 런런 쇼는 홍콩 영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텔레비전 진출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며, 영국 여왕으로부터 Sir 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흔히 쇼브라더스의 영화들이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영화를 접했던 사람들은, 그 이후의 스타들 - 이소룡, 성룡과 같은 - 에 대해서 콧방귀를 뀌는 경향이 있다.
시대에 따라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는 분명 다르며,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누가 더 낫느냐고 따질 것 없이 동시대에 열광하던 추억의 스타들을 똑같이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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