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종철
서기 2017년, 세계경제 체제는 무너졌다. 식량, 석유, 천연자원도 바닥이 났고, 경찰국가는 강력한 통치를 하는 군사지역을 설정했다. TV는 통제되고 죄수들을 잡아 특정 장소에 풀어 넣고 서로 죽고 죽이는 '런닝 맨'은 최고로 인기 있는 쇼프로로 각광을 받는다. 공포 소설의 마왕 스티븐 킹의 [런닝 맨]에서 만나게 되는 미래 세계의 모습이다.
여기서 ‘런닝 맨’은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죽여야만 하는 비정한 프로그램의 이름. 시청자는 죽고 죽이는 상황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즐기고 있다.
[런닝 맨]이 보여주고 있는 미래 세계의 모습은 끔찍하다. 당시는 소설과 영화 모두 흥미로운 내용인 데란 생각을 가졌을 뿐이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쩌면 미래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엔터테인먼트는 저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아니 확신이 자꾸만 들기 시작한다. 요즘 인터넷 세계를 보면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다. 단지 상상에서만 그리던 미래가 아닌 조금씩 그런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다.
[런닝 맨]이 떠오른 것은 미군 병사가 이라크 군인에게 죽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벌어지는 일 때문이다. 이 실제 처형 장면은 많은 화제 - 이를 화제라고 해야만 하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 가 되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은 앞을 다투어 이를 방영하고, 인터넷은 이미 폭격을 맞은 듯이 난리가 났다. 조금만 자극적이어도 미친 듯이 퍼지는 매체의 성격상 진짜 ‘스너프’인 이 동영상은 광범위하게 뻗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끔찍하게 죽는 것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며 그 소감을 한 마디씩 토해낸다.
그것을 보고 솔직히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인성이 파괴된 인간에 대한 실망? 아니면 분노인가? 그도 아니면 흥미로운 영상을 보았다는 만족인가?
느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미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 미군이 이라크인 포로들을 학대했다는 뉴스가 매일 같이 언론을 통해서 보도가 되는 상황에서, 그 보복의 행위로 나타난 공개 처형 장면. 나는 이 영상을 보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이와 관련한 뉴스가 방영이 될 때 말세란 생각으로 채널을 돌렸다.
뉴스는 사실 그대로를 보도할 의무가 있지만, 이것은 아니다. 시청률 경쟁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 왜 사람이 죽는 것을 내보내만 하는가?
방송은 시청률이 중요하고 따라서 특종은 필수적이다. 그들에게 이런 저런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 생리상 무리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통제가 가능할 법도 한 인터넷은 지금 개판이다. 이제 사람이 죽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시대가 도래한건 아닐까 두려워진다.
이미 많은 커뮤니티에 관련 글, 혹은 못 본 사람들을 위해서 친절하게 볼 수 있도록 링크 주소를 올려준다. [런닝 맨]과 같은 쇼프로의 예고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 상태로 지속이 되면 더 많은 자극을 찾기 마련이고, 방송은 시청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한 예로 주변에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면, 발걸음도 가볍게 현장으로 향한다.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놓치면 안돼지란 생각으로 평소보다 걸음 속도가 빨라짐을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교통사고가 났다면 사람이 얼마나 다쳤을까 하는 걱정 보다,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더 강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현장 가까이 다가가서 참혹한 광경을 직접 보고자 애를 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아도 대다수는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저버리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리고 피범벅이 된 현장에서 저런~ 하며 혀를 찬다. 속으로는 자신이 그 희생양이 아닌 걸 천만다행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예로부터 싸움 구경, 불구경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라고 했다. 언제부터 이런 격언이 시작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를 볼 때 남의 불행이 나에게 자극이 되는 것은 요즘 일만은 아닌 듯 하다. 그리고 인터넷이란 신매체의 등장으로 인해, 남의 불행은 본격적으로 엔터테인먼트로 변화가 된다. 개인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사진을 누군가가 가져가 합성을 하고 ‘병신~’이라며 키득거리며 좋아하는 인간들이 넘쳐난다.
그것을 보고 놀려대는 인간들은 한 술 더 뜨는 식이다. 얼마 전 인터넷 최고의 인기 동영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버스 기사 폭행 사건에서 보인 사람들의 반응은 여름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대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그것은 사실적인 액션 영화에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오락성을 제공했다. 몇 번을 보아도 재미있다는 식으로 반복적으로 감상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만 갔다. 그들은 그것을 보면서 세상이 개판이 되었음을 개탄하지만, 한 편으론 은근히 폭력의 현장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는 이중적 모습을 드러낸다.
호기심 충족을 위해서,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리얼리티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 감상을 하면서, 뚫린 입에서는 세상이 말세라는 식으로 얘기를 해서 되겠는가? 더 나아가 주변 사람에게 보도록 권하고 있다.
무참한 폭력에 몸이 부서지고 있는 그 사람, 당신 아버지라면 그딴 식으로 보고 있겠는가? 주변 사람에게 보라고 권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어차피 세상은 남의 불행을 노골적으로 나의 오락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미군 포로의 공개 처형 장면을 통해 당신은 정말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그 희생자가 가련하다고 생각은 되겠지만, 남의 끔찍한 불행을 단순한 유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특히 공포 영화 팬들은 신이 났다. 더 잔혹한 걸 찾고 있는 그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고어의 궁극 ‘스너프’가 진짜로 탄생을 했기 때문이다.
이럴수록 이 장르 팬들은 좀 더 조심을 해야 한다. 대중이 바라보는 공포 영화,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은 이유 없이 만들어 진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스페인 출신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떼시스]는 이를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우리는 여주인공이 사고가 난 현장 가까이에 다가서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녀가 사고 현장을 대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네 자신들의 모습이다. 남의 불행을, 끔찍한 광경을 어찌 볼 수 있을까란 순진한 생각의 속내를 드러낸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호기심에 의해 사고 현장으로 다가서며 힐끗거린다. 여기서 카메라 렌즈는 관객의 눈을 대변하며, 기차에 치여 걸레짝이 되었을 사람을 그녀와 관객이 동시에 상상한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사람의 죽음을 가벼이 대하지 말자. 다른 사람의 죽음을 태연히 받아들이면서 볼거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성이 파괴되었다는 증거다.
그럼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범죄. 전화를 오래 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가슴에 칼을 박고, 카드 빚을 갚아주지 않는다며 가족 몰살을 시도한 사이코. 이것이 요즘 세상의 모습이다. 그리고 점점 더 이런 사건들은 경각심을 일깨우기 보다는 서서히 아주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그 속에 드리운 어둠을 끌어낸다.
"자! 여기 화끈한 남의 불행이 있네. 사지가 휴지 조각처럼 짓이겨 있는, 창자는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고, 바닥은 피로 흥건하다네. 목이 잘려지는 것을 원하면 그것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네. 어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보여줄테니, 한 번 신나게 즐겨 보지 않겠는가! 재미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권해 주면 그걸로 족하다네!"
혹 귓전에서 이런 속삭임이 들리지 않는가? 그래서 그것을 보고 난 후 남에게 권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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