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 그리고 OST-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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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근래 들어 한국영화는 믿기 힘든 상승을 거듭하고 있다.
영화의 제작자체가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처럼 인식되고 있고 영화관련 산업들은 불황이라는 단어와는 아예 담을 쌓은 듯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화려하게 성공한 영화들의 배후에는 많은 것을 아낌없이 포기한 수많은 스탭들이 포진해 있고, 그중에서도 척박하기 그지없는 한국영화음악의 현실을 딛고 영화음악의 예술적 승화를 위해 노력해온 작곡가들의 공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작곡가 신병하씨는 한국의 영화음악을 거론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물로써 그의 작품목록이나 이력을 살펴보면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받았던 감성적 교감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그에게 빚지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게 한다.
한국영화음악의 역사를 편의상 세대별로 나누었을 때 신병하씨는 1세대급에 해당하지 않을까? 영화음악의 중요성과 제대로 된 인프라조차도 전무했던 시절이 비교적 최근까지의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신병하씨가 활동을 시작했던 1970년대말부터의 작업은 한국영화음악의 역사의 중심점을 관통하고 있어 그 존재만으로도 유일무의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작곡가 신병하씨는 밴드음악과 미군부대 활동등으로 다져진 현실적인 감각의 토대위에 영화 [갑자기 불꽃처럼]으로 영화음악계에 입문한 1979년을 시작으로 80년대, 그리고 90년대초까지 끊임없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당시 한국영화음악계의 새로운 개척자로 평가받았던 김수철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나름대로 작품성이 인정되는 영화들에서는 항상 이들의 이름을 엔드 크레딧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 말 그대로 최고의 전성기였다.
영화음악 100여편, 드라마음악이 무려 50여편을 상회하는 신병하씨의 음악역사는 그 작품의 숫자만으로도 압도감을 주기에 충분하지만 뒤집어 본다면 이 사실은 당시 열악하기만 했던 상황 때문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소지가 보인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는 너무나도 많은 영화들속에서 신병하씨의 음악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창작행위 자체가 소모적으로 오인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본의 아니게 다작(多作)을 하는, 또는 할 수 밖에 없었던 작곡가들에게 항상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딜레마이다. 그러나 신병하씨의 이런 다작경력이 그렇게 염려스럽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의 음악에서 풍기는 골깊은 감성과 고뇌의 흔적 때문일 것이다.
결론부터 성급하게 말하자면 두말 할 나위없이 작품 자체가 뛰어났다는 이야기인데 - 영평상, 대종상, 춘사예술상, 백상예술상에서의 수많은 수상경력은 그것을 잘 뒷받침 해주는 단편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작곡가이자 대중음악가였던 김수철씨가 영화를 통해 음악을 새롭게 관조하고 다른 개념으로 접근해갈 때 그 역사에는 임권택 감독이라는 거장과의 조우로 더욱 빛을 발했듯이([태백산맥] [창] [축제] [서편제]) 신병하씨의 음악여정에도 큰 획을 그어준 작업들이 존재하는데 [씨받이] [남부군] [서울무지개] [장군의 아들] [하얀전쟁] [개벽]등이 바로 그것이다.
위의 작품들도 하나같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혹은 그 역사의 민감함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한 문제작들이며, 완성도 또한 의심할 바 없는 역작이라는 점에서는 서로에게 동의어처럼 들린다.
하지만 음악적인 구성에서는 엄연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김수철이 국악적인 것, 한국적인 정서로 영화를 풀어간다면 신병하씨의 음악은 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서정적인 멜로디라인이 주가 되는 형태를 띄고 있다.
[남부군]이나 [장군의 아들]과 같은 화제작들도 영화의 느낌만으로 판단되는 정서적인 뉘앙스와 신병하씨의 음악은 아마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이라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패턴 - 신디사이저(휴먼보이스 계열의 스트링사운드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음색의 바탕위에 느린 변화를 추구하는 그만의 독특한 정서는 그 구성의 소박함과는 별개로 이후 많은 작곡가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이런 패턴의 성공적인 대중화를 꼽으라면 역시 [소나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MBC TV의 인기프로그램이었던 ‘베스트셀러극장’에서 방영된 이 단편은 수없이 제작되었던 고전 연예소설(?)인 황순원님의 원작에 가장 충실했다는 격찬을 받았는데 한편의 영화처럼('Film Like'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펼쳐지는 90여분의 아름다운 영상과 절제된 연출력, 배우들의 연기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 TV 단편의 호평과 그외 가시적 성과에 가장 큰 날개를 달아 준 실제적인 주체가 신병하씨의 음악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금도 한국의 영화음악을 얘기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명곡인 [소나기]의 음악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신비스러운 신디사이저의 도입부로 시작된다. 곧이어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되는 테마가 제시되는데 놀라운 것은 이 테마가 반복될 때마다 느껴지는 상승효과이다.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되는 테마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반복에서는 마치 소설속의 주인공 소년과 소녀를 연상시키는데 단순히 옥타브의 변화만으로 이런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후의 반복에서는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 없는 보이스가 등장해서 어쿠스틱 기타와 함께 테마부를 반복하면서 곡을 맺어주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신병하씨의 어린 아들이다.

신병하씨의 이런 패턴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의 작업들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호응을 얻었다. [남부군]이나 [장군의 아들]과 같은 작품에서도 이런 패턴의 음악은 영상과 완벽하게 조합되면서 자칫 역사물이 보여줄 수 있는 사소한 오류나 논쟁을 간단하게 무마시킬 수 있을 정도로 영화전체에 안정된 균형감을 제공했다. 물론 그의 음악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신병하씨의 디스코그래피를 살펴보자.
안타깝게도 신병하씨의 음악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음반의 발매상황은 그가 한국영화음악계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해 본다면 놀라울 정도로(!) 절망적이다. 드라마 음악인 [장희빈] [그대 그리고 나]를 제외하면 공식적인 영화관련음반은 4장인데 이 음반들중에서 단일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은 [하얀전쟁]과 [접시꽃 당신] 두장이 유일하며, 나머지 음반들은 신병하씨가 작곡했던 영화음악들을 선곡해 놓은 컴필레이션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리고 영화음악 매니아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현재 수집순위 1위는 앞에서 필자가 언급했던 [소나기]나 [남부군] [장군의 아들]과 같은 음악들이 모두 실려있는 [신병하 영화음악 모음]과 80년대 초기작품들을 수록한 두장의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하지만 네장의 영화관련 앨범들은 모두 LP시절에 발매되었던(필자가 알기로는 CD로 재발매가 이루어진 것은 [하얀전쟁] 뿐이다) 것들이며 이마저도 지금은 구입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현실은 신병하씨의 팬들을 더욱 허탈하게 만든다.

개인이든, 집단이든간에 시간이 지나버리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쉽게 잊혀져 버리는 것이 역사라고들 한다. 하지만 한국영화음악계에서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는 신병하씨의 음악을, 그의 역사를 음반으로도 접하기 힘들다는 사실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것은 열악했던 환경에서도 꿋꿋이 자리매김을 하며 예술가의 모습을 지켜왔던 신병하씨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크게 봤을 때 한국영화음악의 역사를 무시하는 중대한 오류이기 때문이다.

- Writer 김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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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4box@hanmail.net) boxworld
영화음악가/국내 l 2008/07/24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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