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인기 영화음악가라는 호칭이 과연 가능할까?' 고백컨대 필자는 영화음악을 들어오면서 항상 이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질문의 요지가 다소 유치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필자를 비롯, 나름대로 영화음악을 들어왔다고 자부하는 수많은 매니아들은 이런 호칭이 썩 잘 어울리는 작곡가가 우리나라에서도 나오기를 애타게, 진심으로 바랬을 것이다.
인기있는 영화음악 작곡가의 등장이 발전과 동일시되지는 않지만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제대로 정리할 역사도 없었던 한국영화의 음악사에 큰 획을 긋고 그 흐름을 선도해 나갈 수 있는 '인물'이 하나쯤 등장해서 새로운 시도가 성공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 필자는 매니아들의 욕망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엔니오 모리꼬네나 존 윌리엄스, 한스 짐머같은 작곡가의 선례를 보라. 이미 그들의 네임밸류는 영화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흥행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다행히 우리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실력과 대중적인 센스를 함께 겸비한 작곡가들의 출현을 지켜보면서 다양하게 표출되는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소개하는 조성우님이 그런 조건을 100퍼센트 만족시키는 영화음악가라고 단정지을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한국의 영화음악이라는 텃밭에 선배작곡가들이 씨를 뿌렸다면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기름진 토양을 일군 것은 그의 몫이라고 말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조성우님은 철학학도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외국이라면 모를까, 우리나라에서 타장르로부터 영화음악으로 전이되는 경우가 이렇게 완전히 판이한 예는 매우 희귀한데 대학시절 기타연주자로 밴드음악 생활을 했다는 전력이 그나마 최소한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음악이라는 것이 - 더군다나 영화음악이라는 것이 열정과 약간의 경험으로만 되는 장르음악이 아니라는 것은(이론과 시스템을 모두 이해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영화음악이 만들어진다는 당연한 점을 상기시켜보라. 말이쉽지 이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조성우님의 이력에서 다른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가능하게 하고, 이 답안은 앞서 언급했던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도출된다.
조성우님은 인터뷰에서도 '철학을 전공한 경험이 영화적 상상력과 창작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라고 이미 말한바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미천한 필자의 지식과 고정관념이 영화음악과 철학이라는 상관관계의 설득력있는 필요충분조건을 성립시키기는 힘들겠지만 분명 일리 있는 말이다.
우리는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음을 앞둔 주인공의 눈을 통해 역설적으로 삶의 따뜻함을 보듬는 감독의 시선에 감탄한 바 있다. 젊은 감독답지않은 심도있는 사색과 통찰을 통해 한국영화의 새로운 미래를 발견했다는 격찬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 배후에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밀고 당겨주는 음악의 힘이 컸다는 것은 조금 늦게 매니아들의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곧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은 한국영화에서 유례없는 작품으로 칭송받기에 이르는데 주연배우 한석규가 부르는 동명의 주제곡이 사람을 끌어모았다면 이후에 더욱 음악에의 몰입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역시 조성우님이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닐까?
기존의 많은 영화음악들이 극의 내러티브를 방해하거나, 거듭된 몰이해로 인해 최소한의 목적의식마저 상실한 스코어로 전락했던 선례들은 조성우님의 음악으로인해 제대로 평가받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며, 조성우님 개인적인 의미에서는 영화아카데미 시절의 단편영화 [고철을 위하여]에서 시작된 인연이 첫 번째 장편영화인 이 작품에서 바로 결실을 맺는 뜻깊은 것이기도 하다. 사족으로 하는 말이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의 사운드트랙 앨범은 최근 DVD가 발매되면서 서비스차원에서 함께 포함된 OST로 접하기전까지는 소장가치, 재발매 희망 순위에서 늘 1위를 차지했던 희귀음반이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조성우님의 활약은 거의 독보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승승장구를 거듭하게 되는데 이동준과 함께 양분된 이 구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매년 서너편의 영화음악을 담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조성우표(?) 앨범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양적으로도 엄청난 디스코그래피를 채웠는데 작품성을 고루 겸비해 한국영화음악의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길만한 주목할 만한 몇 작품들을 추려보자.
[약속]이나 [정사]에서 들려주었듯이 인물을 포함한 영화전체의 감성을 파편화시키거나 이미지로만 표현하는 음악이 아닌,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몰입을 유도할 수 있는 골깊은 사운드와 편곡이야말로 조성우님의 음악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이다. 때문에 그의 음악은 시각적 현란함에 호소하는 작품들(우리가 흔히 블록버스터라고 부르는)보다는 수평적인 구조에 좀 더 근접해있는 드라마의 그것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살펴보면 [용가리]와 같은 뜻밖의 작품들도 간혹 발견되긴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 비교적 최근작인 [선물]이나 [순애보]에서 들려주었던 그의 혜안 - 드라마의 특색을 음악으로 패턴화시켜 구체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은 이제 매니아들에게 두터운 신뢰를 주는 수준까지 업그레이드 된 듯 하다. 예를 들어 [플란다스의 개]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들려주는 세련된 재즈의 교감은 그가 단순히 영화만을 염두한 단순시각에서 벗어나 전체를 아우르는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증명했고(조성우님 말에 따르면 [플란다스의 개]는 매우 흡족하게 진행된 작업중 하나라고 한다) 이런 시도는 곧 그가 디렉터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여기에 탁월한 대중적인 취향이 가미되면서 그의 영화음악에 대한 감각은 정점에 달하는데 굳이 [약속][정사]등에서 삽입된 외국 곡의 경우를 들지않아도 얼마든지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몇 개의 사운드트랙들에서 발견되는 - 출연배우들이 직접 불러주는 생생한 음악의 경연장에서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씨의 노래는 그렇다치더라도 [킬리만자로]에서 가수 나미의 '슬픈인연'을 을씨년스러운 목소리로 읊조리는 박신양의 노래라든가, [봄날은 간다]의 쓸쓸한 정서를 대변하는 유지태의 노래등은 영화속의 배우들이 단순출연에 그치는 것을 막고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관객과 배우, 영화와 관객으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관계를 좀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데 큰 일조를 했다고 평가된다.
주제곡이 아닌 스코어만으로 인기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실토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들려준 호소력있는 코러스, 시크릿가든의 서정적인 넘버로 시작되는 [선물]의 음악,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채리필터가 신명나게 불러준 '해뜰 날'의 과감함은 참신한 기획력이 상품화의 벽을 넘어 진정한 작품으로 업그레이드되는데 기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일등공신에 다름아니다.
단 한편의 영화를 감독하고 거기에서 창출된 자본으로 시스템을 건설한 조지루카스가 그랬듯, 영화음악가의 인기나 창작의지도 시스템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한 조성우님의 감각은 영화음악 전문프로덕션 'M&F'로 이어지고 있다. 프로덕션 M&F에서 구축된 시스템을 기반으로 후배작곡가들의 양성에도 힘쓰는 반면, 상업성에 무릎꿇고 참패를 하더라도 의지로 밀어나갈 수 있는 그만의 기반은 열악한 한국영화음악계에 자존심을 세워줄 수 있는 유일한 보루가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M&F에서 발매한 앨범으로는 [봄날은 간다]와 [고양이를 부탁해]가 있다)
그러나 늘 필자가 얘기해왔듯이 한국영화음악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
이제 막 피어오르는 영화음악이라는 꽃봉오리에 부족한 관심이나 지나친 논의는 오히려 자생력을 꺾을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 진정 영화음악을 사랑하는 매니아라 닦아놓은 텃밭을 혼자서 일구는 조성우라는 작곡가의 모습을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그가 양질의 작품을 어렵사리 토해낼때 기꺼이 호응해줄 수 있는 자세와 마음가짐이다.
장담하건데 이렇게 단시간내에 화려한 경력을 일구어낸 작곡가는 없었다, 그가 한국의 영화음악을 일구는 진정한 일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한사람의 작곡가 스타만들기에 동참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그가 지금처럼 진정으로 영화음악만을 위해 작업하는 장인의 모습을 보일때, 아무도 돈안되는 영화음악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때 더 꿋꿋한 모습으로 시스템에 몰두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아마 매니아들은 조성우라는 작곡가를 한국의 엔니오 모리꼬네나 한스 짐머같은 스타로 만들 용의가 있다. 진정으로.
- Writer 김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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